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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이 떠 있는 태양은 더할 나위 없는 싱그러운 햇살을 내게 선사했다. 나는 아지랑이가 막 피어오르려는 아스팔트 위를 걷고 있었고, 그림자는 아까부터 계속해서 내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나는 뒤돌아 서 내 그림자를 보며 말했다.
"춥지 않아?"
"춥지 않아."
그림자는 단호했다. 나는 이 따뜻한 온기를 나만 느끼는 것이 조금 미안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되 물었다.
"정말 춥지 않아?"
"......"
"추우면 내가 자릴 바꿔줄까?"
"말도 안 되는 소리."
"아니 나는 항상 나만이 따뜻한 햇살을 쬐는 것을 네게 미안해하고 있어."
"아니 그렇지 않아."
"아냐 그래."
"헛소리! 네놈은 언제나 내 앞에 서서 모든 것을 다 얻고 난 후에 갖은 연민을 담은 표정으로 날 바라보며 지껄이지! 네놈이 처먹고 남은 찌꺼기를 줄테니 어떠냐고 말야. 닥치고 앞이나 보고 걷기나 해. 그래야 네놈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잖아. 빌어먹을 이중인격자야."
"......"
"내가 네놈이 가진 것을 원한다 해도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듯이 내게도 네놈이 가지지 못한 무언가가 있어 그러니 다신 그런 불쌍한 표정 지으며 내게 그딴 말을 지껄이지 마. 알겠어?"
"그렇지만 우린 하나잖아. 내가 가진 걸 네게 주고 싶은 건 당연하다구."
"거짓말. 그 반대겠지. 그리고 만약 네 말이 사실 이래도 나는 그렇지 않아."
"......그래 알겠어."
나는 다시 길을 걷기 시작했다. 얼마나 걸었을까. 처음에는 따스했던 햇살이 점점 따가워졌다. 살가죽을 파고드는 듯한 고통이 내 목 언저리에 한여름 파리처럼 진득하니 내려앉았다. 점점 짜증이 밀려왔고, 무더운 햇살에 탈진하기 직전 나는 다시금 내게 붙어 따라오는 그림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림자는 내 앞으로 자릴 옮겨 있었다.
"왜 이제 생각이 바뀌셨나?"
그림자는 내게 쏘아붙였다.
"내게 시원한 그늘을 주지 않겠어?"
"미안하지만 그건 무리야."
"부탁해."
"왜 네놈은 이까짓 작은 시련에도 남에게 도움을 청하지?"
"도움을 청할 수 있다면 그러는 게 좋잖아."
"이세상의 모든 것은 공평하지 않아. 그러니 네가 가질 수 없는 것에 욕심을 내지 마. 그것은 과욕이야. 그렇다면 어떠한 대가를 치룰 지 장담 못해."
"난 지금 목이 따갑고, 더 있다간 화상 입을 것 같아. 그러니 내게 그늘을 줘. 그렇지 않으면 난 화상을 입어 버리고 말거야."
"어처구니 없는 저능아로군. 뒤돌아서면 될 것 아냐!"
"그러면 얼굴이 따갑잖아."
"네놈은 어떤 것을 얻을 때 무엇 하나 노력해보지 않고, 남의 힘만을 빌리려 하는군. 네놈에게 질렸다."
"알았으니 제발 내게 그늘을 줘. 목이 따가워 미쳐버릴 것만 같아."
"......정 그렇다면 네놈에게 그늘을 주지 대신 조건이 있어."
"뭔데?" "이 꿈이 깨고 다시 현실로 돌아가면 다신 날 찾지 마. 네놈은 자립하는 법을 배워야해."
"아무튼 어서 그늘을 달라구."
"대답해 멍청아."
"아, 알았어. 그러니까 어서!"
"......"
눈을 뜨자마자 나는 목 언저리를 매만졌다. 손바닥에 식은땀이 진득하니 묻어 나왔다. 어째서 꿈속에서도 촉감이 느껴지는 것일까. 뜨겁다는 느낌이 정말 생생하게 와 닿았었다.
"후우......"
한숨을 내 쉬다 나는 뻐근한 허리를 간신히 들어 침대 맡에 앉았다. 꽤 오래 기억에 남을 만한 요상한 꿈이었지만 자는 내내 숨겨두었던 입시 스트레스가 슬금슬금 자취를 드러내자 꿈에 대한 기억은 안개처럼 길을 잃고 뿔뿔이 흩어져 버렸다.
대입수학능력시험 을 세 번 이나 치르게 된 것은 사실 내 의사와는 상관없는 부모님을 원한 처사였다. 어린 시절부터 후광에만 의지해 살아온 나는 내 의사를 펼칠 기회가 적었었다. 학창시절부터 등에 업은 배경 때문인지 또래 친구들은 나를 이따금씩 무시하곤 했고, 나 역시 그들에게 관심 받고 싶은 감정 따윈 없었다. 그러나 언제부턴지 점점 외톨이가 되어가는 나를 발견하고선 생각을 고쳐먹었다. 하지만 이미 되돌릴 수 없을 만큼 나는 '평범한 학생' 이란 단어와 멀어져 있었고, 환경이 만들어 놓은 내성적인 성격과, 남들의 시기와 질투를 죄다 받는 배경 때문인지 점점 더 은둔 형 외톨이가 되어 갈 수 밖에 없었다.
그런 이유도 있고 해서 나는 유별나게 공부에만 매달렸다. 제대로 된 친구 하나 없고, 외형 또한 추레했으며, 성격 또한 갓 시집간 조선시대 새댁 같았으니 학창시절에 특별히 다른 것에 매달릴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내가 공부에 매달리자 부모님은 나를 언제나 지원해주었고, 나는 그렇게 그들의 장단에 맞추어 주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오로지 단 하나 밖에 없던 내 맘대로 되던 것이 내게 실패를 안겨다 주고 말았다. 사실 부모님이 원하는 대학은 말로만 듣던 국내 상위 2% 클래스였다. 나는 솔직히 좋은 머리는 아니어서 단지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 성적을 내는 스타일이었기에, 보기 좋게 수능시험에서 좌절 하고 말았다. 금이야 옥이야 내게 갖은 공을 다 퍼부었던 부모님이었기에 내게 날아온 질타는 상상 이상이었다.
그래서 고학력에 티끌만큼도 욕심 없는 내가 부모님의 강압적인 재수 권유에 지난 2년간 악착같이 공부를 해온 것이었다. 허나 재수 역시 아슬아슬하게 부모님이 원하는 대학에 못 미치는 점수가 나와 이번에 삼수를 하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오늘이 그 당일 인 것이다.
"후우......"
노력은 충분히 했다. 세상에 노력으로 안 되는 것이 없다던 아버지의 훈계 섞인 말씀이 귓가에 맴돌았다.
두꺼운 외투를 입고 집을 나서는데, 출근 하신 아버지를 대신해 어머니가 차 키를 들고 집 앞에서 기다리고 계셨다.
"어서 타 시간도 별로 없는데, 한자라도 더 보고 쳐야지."
"네."
차에 타려는데 오늘따라 어깨에 멘 가방이 더욱 무겁게 느껴졌다. 이 어깨엔 이 세상에서 나를 아끼는 단 두 사람의 희망이 달려있다. 내겐 학업에 대한 욕심은 없지만, 나를 아껴주는 두 사람에 대한 배신은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그들에게 더 이상 실망을 안겨주었다간...... 그랬다간......
"마셔. 알로에야. 아침에 원활 한 머리 회전을 돕는다더구나. 너도 알겠지만, 더 이상 시간이 없어. 올해가 마지막이어야 해. 이번에 떨어지면 그냥 군 입대 시켜버릴 테니 그렇게 알거라."
"네."
어머니는 눈짓으로 뒷좌석에 놓인 보온병을 가리켰다.
로봇.
백미러와 사이드 미러를 보며 안면 근육 과 성대만으로 이야기를 해대는 어머니나 차창을 내 다 보며 텅 빈 마음으로 대답하는 나 나 정말 로봇이 따로 없었다.
목구멍으로 넘어 가는 알로에 맛이 단맛인지 쓴맛인지 느낄 겨를 도 없이 어머니는 나를 시험 장소에 내려주시곤 인사말도 없이 차를 몰고 어디론가 가버리셨다. 요즘 들어 부쩍 외출도 잦고 화장이 두터워진 어머니였다.
시험장소인 모 고등학교는 꽤나 북적거렸다. 벌써 세 번째 맞는 풍경이다. 특별할 것도 없는 이 풍경을 지나쳐 나는 무거운 발을 이끌고 교실로 들어섰다. 이윽고 시험시간은 다가왔고, 나는 3년간의 노력을 헛되게 하지 않기 위해 심혈을 기울여 한 문제 한 문제 씩 풀어나갔다.
마지막 시험이 끝나는 종이 울리자 나는 비로소 해방감을 느낄 수 있었다. 시험 결과는 안 봐도 불 보듯 뻔했다. 아버지의 말씀이 옳았다. 노력으로 안 되는 것은 없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성공적인 시험 이었다. 며칠 후 개재 된 시험 결과는 부모님이 원하는 바로 그것이었고, 오랜만에 집안은 화기애애한 공기가 넘쳐흘렀다.
"해내리라 믿었다. 내가 그러지 않더냐. 노력으론 안 되는 게 없다고. 큰일 해냈다. 더더욱 학업에 매진해서 내 뒤를 잇거라."
"네 아버지."
어머니역시 아버지 옆에서 온화한 미소로 화답했고, 나는 그들의 미소와 칭찬에 기분이 좋아졌다. 그러나 그 뿐이었다. 달라진 것은 없었다. 여전히 내 의사는 없었고, 나는 공부를 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지금도 누군가 내게 왜 공부를 하냐고 묻는다면 나는 간단하게 대답할 수 있다.
그냥.
부모님이 좋아하시니까.
그날 나는 사랑하는 내 애완견 메리의 푹신한 털 감촉을 느끼며 아주 오랜만에 숙면을 취할 수 있었다. 정말이지 꿀맛 같은 단잠이었다.
"신입생이세요?"
"네."
신입생 환영회는 여느 대학 못지않게 시끌벅적 했다. 술에 절어 곤드레만드레 돼버린 선배들이 여럿 있었고, 게 중에는 여자 신입생에게만 집적대는 무리들도 있었다. 내게 말을 건 자는 자신을 학과대표라 소개했고, 나는 그의 악수에 가볍게 응했다. 그는 훤칠한 키에 시원한 마스크를 가지고 있었고, 매력적인 보이스를 겸비하고 있었다. 학과대표 라면 안 봐도 불 보듯 뻔하지만 과내에서도 톱 클레스이리라.
그는 내게 인사를 마치고 내 옆 테이블의 여자 신입생 무리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나 역시 그의 시선을 따라 그 여자 신입생 무리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서하나 라고 해요."
오로지 단 한명. 난생 처음 마셔본 술 때문에 기분이 이상해져서 그럴지는 몰라도 오로지 단 한명의 목소리만 선명하게 들렸다. 학과대표의 매력적인 보이스도 그 목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내 귀는 오로지 그녀의 목소리만 필터링하고 있었다.
"잘 부탁해요."
그녀의 목소리가 가슴속에서 한번 메아리 쳤다. 정말 이상한 느낌이었다. 주체하기 힘든 즐거움, 행복함. 지금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이 순간 밀려드는 감정이었다. 가정부가 울고 웃으며 보던 연속극 속에서나 나오던 대사를 이해 할 수 있는 순간 이었다.
'한 눈에 반했다.'
내가 그날 그녀에 대해 알게 된 것은 단 그녀의 이름이 전부였고, 그녀를 본 것 또한 그날이 처음이었다. 그러나 나는 단언 할 수 있었다.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노라고.
아무것에도 흥미 없던 내가, 언제나 피동적이었던 내가, 처음으로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었고, 능동적으로 무언가를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신입생 환영회가 끝나고 이틀간의 주말을 보내면서 처음으로 월요일이 오길 고대했다. 48시간의 주말이 이토록 지겹게 느껴질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서하나...... 서하나......"
사람의 기억력이란 참으로 보잘 것이 없어서 멍청한 나의 뇌는 그녀의 이미지를 제대로 기억해내지 못했다. 허나 의외로 가슴은 그녀의 이름을 욀 때마다 두방망이질 치며 반응했다. 이런 것이 사랑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기어코 월요일은 오고야 말았다. 나는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급한 마음에 허둥지둥 대기 시작했다. 그녀를 보고픈 마음은 굴뚝같았고, 나는 결국 아침 해도 채 뜨기 전에 캠퍼스에 발을 딛고야 말았다. 아직 꽃샘추위가 만연하는 날씨라 싸늘한 강의실은 온몸을 떨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나는 춥고, 어두운 빈 강의실에 혼자 우두커니 앉아 오롯이 그녀를 기다렸다.
한 시간 쯤 지났을 까 햇살이 창을 투과해 빈 강의실에 온기를 불어놓고 있을 무렵 드디어 처음으로 강의실 문이 열렸다. 허나 얼굴도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몇 명의 남자가 들어오더니 강의실문은 다시금 굳게 닫혀버렸다.
그 이후로도 몇 번이나 강의실 문은 열리고 닫혔지만 그녀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강의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렸음 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어째서 오지 않는거지......'
점심시간이 지나고, 나는 강의실에 앉아 계속해서 그녀를 기다렸다. 그러다 나도 모르게 옆에서 누군가 수군거리는 소리를 엿듣고 말았는데, 하마터면 그들의 주둥이를 주먹으로 으깨버릴 뻔했다. 대학가는 문란 하다는 이야기를 인터넷 어딘가에서 주워들은 적이 있었는데, 내 옆자리에서 수군거리던 이들의 주된 문란한 이야기는 바로 신입생 환영회 이후의 스캔들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리고 게 중엔 그녀와 학과대도 연루되어 있었다. 그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둘은 환영회가 끝나기도 전에 자취를 감추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모텔에서 함께 나오는 것을 보았다는 이야기 까지.
더 들을 것도 없었다. 나는 머리끝까지 차오른 화에 못 이겨 그들에게 소리쳤다.
"당사자가 없다고 막말해도 되는 겁니까? 만약에 당신들이 한 이야기가 사실이 아니면 당신들 어떻게 책임 지려구요? 내가 하나씨 에게 당신들이 한 이야기 그대로 고해 바쳐 볼까요?!"
"아......아니, 그,그게......"
"말 더듬는거 봐. 참 나 앞으로 입 함부로 놀리지 마십시오."
그들은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내 외침에 다른 이들의 이목은 전부 내 쪽을 향했고, 결국 소문을 토대로 뒷담화를 시도하던 그들은 고개를 숙인 채 비에 젖은 생쥐들 마냥 꼬리를 감추었다.
나는 화가 조금은 풀리는 듯했으나, 그 기분 나쁜 소문이 계속해서 머릿속에서 맴돌아 도무지 강의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더는 참지 못하고, 자리를 박차고 강의실을 나서려했다. 그 순간 강의실 문이 열리며 내가 그토록 기다리던 그녀가 나타났다. 학과대표와 함께.
나는 그 자리에 뿌리내린 나무처럼 경직되어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어째서 그녀가 저놈과 함께...... 정말 소문이......'
생각도 하기 싫은 것들이 머릿속을 헤집었다. 나의 머리는 한편의 드라마를 만들듯 그녀와 놈이 술집을 나서 모텔로 들어 선후 육체사랑을 하고 있는 모습 까지 그리고 있었다.
'말도 안돼!'
쩍.
도끼질에 힘없이 기울어 버리는 나무처럼 나는 그 자리에 쓰러져 버리고 말았다.
“그림자야. 그림자야. 어디 있니.”
칠흑 같은 암흑 속에서 내 반쪽을 찾기란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는 것 보다 더 힘든 일이었다.
외치고 불러보아도 나타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갈구했다. 그의 존재를.
“나의 그림자야. 나의 반쪽아 제발 나를 도와주렴.”
“시끄러 꺼져.”
“오! 거기 있구나. 내 얘기 좀 들어봐.”
“이런 행려병자 같은 새끼. 남의 도움 없으면 혼자선 피죽도 못 마실 새끼 같으니라구. 찾지 말라고 한 거 기억도 안나나 보지 금붕어 대가리야?”
구원투수.
9회 말 2아웃, 주자는 만루, 거기다 풀 카운트다. 상대방 타자는 4번 타자 올 시즌 홈런왕 유력휴보. 이도 저도 못하고 식은땀만 질질 흘리고 계실 내 육체와는 달리 언제나 현명하고 냉철한 나의 반쪽은 아마 정확하게 스트라이크를 골라냈을것이다. 나는 그런 내 반쪽. 그림자에게 눈이 올 때나 비가 올 때나 쨍쨍할 때나 의지해왔다.
그게 무엇이 나쁜가. 그는 내가 높은 연봉 주고 고용한 몸값 졸라게 비싼 마무리투수처럼 내 몸에 기생해 살고 있는 그림자가 아니던가. 그러니 당연히 주인장을 도와야지 안 그런가. 그러나 입 밖으로 그런 말을 지껄였다간 성격 지랄맞은 저놈의 심기를 건드릴지 모르니 나는 사시사철 고분고분 해 질 수 밖에 없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내 바람을 이루어주는 녀석이니 말이다.
“그러지 말구 내 이야기를 좀 들어봐.”
구걸.
그래 빠른 시간 안에 놈의 비위를 맞추려면 그래야지. 나는 지금 급하단 말이야.
무릎을 꿇은 채로 저 어둠의 심연 속에서 날 비웃고 있을 그림자를 향해 말했다.
“이번 한번만 이야 제발 날 도와줘.”
“한번 만 한번 만 그게 도대체 몇 번 인줄 알어? 씨부랄 놈.”
“알지 왜 모르겠어. 하하...... 그런데 이번엔 정말 중요한 일이야. 넌 내 유일한 친구잖아. 난 믿어 네가 날 외면하지 않을 거란 걸.”
짧은 정적.
정적이 흘렀다. 눈을 깜빡이자 어느새 내 머리위에 조그만 백열전구가 도깨비불처럼 둥둥 떠 있었다. 나는 서둘러 주위를 둘러보았다. 정 사각형의 칙칙한 회색 콘크리트 구조물. 어디에도 출입할 수 있는 문 따위는 없었다. 그리고 바닥엔 꼬마전구 만도 못한 은은한 빛에 의지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내 그림자가 보였다.
“어째서 내가 널 외면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지?”
방금 전보다 자못 진지한 어투였다.
“아하하...... 그게......”
“말해 봐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있을 것 아냐?”
놈은 온몸을 비비꼬아 가며 최대한 큰 제스처를 취하며 말했다. 그래봤자 형태도 없는 2차원 인 주제에 말이다.
솔직히 당황스러웠다. 나는 놈의 관심을 끌어내기 위해 한 말이었을 뿐인데, 놈의 반응이 의외로 진지했다.
“그게 그러니까, 나는 네가 나고 내가 너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지.”
“뭔 개소리야 풀어 말해 어렵잖아.”
“하하하 어렵나...... 그러니까 말야 내가 전에도 말했듯이 너와 나는 서로의 반쪽이란 이야기지.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
또다시 정적.
놈은 적잖이 혼란스러워 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언제나 거침없는 언변으로 날 기죽이려 하던 녀석이었는데 이토록 진지하고 조용한 놈은 처음이었다.
“네놈은 언제나 내게 부탁을 해오니 내가 필요할 테지. 그런데 어째서 나 역시 네가 필요하다는 거지? 이 좁은 공간속에 떠다니는 수천, 수만의 한낱 먼지들도 그림자를 가지고 있는데 말이야.”
걸려들었다.
“그들이 두개의 그림자를 가지고 있진 않잖아. 그들이 두개의 본체를 가지고 있진 않잖아.”
“......”
괴변이었다. 무튼 놈의 쓰레기냄새 나는 언어구성력만 봐도 이정도의 괴변이 놈의 수준에 꼭 맞을 거라는 건 당연지사였다. 안 봐도 비디오란 말이다.
“어때 내말이 맞지? 그러니까 이제 거절하지 말고 내말을 들어봐”
“......”
놈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러나 내말을 듣고 있음은 분명했다.
“이번엔 좀 특별한 일이야. 내 인생에 이런 일은 없었어. 이제 껏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 존재했던 내가 이제 드디어 내 존재의 이유를 알게 된 것 같아.”
“무슨 소리야.”
“내 의지대로 행하고 싶은 것이 생겼단 말야.”
“호오...... 확실히 여태껏 네가 부탁해 왔던 시시껄렁한 이야기들과는 다를 것 같군. 하긴 성적 올려달라느니, 아버지 일 잘되게 도와 달라느니 이딴 개소리할 나인 지났지.”
“그래 잘 들어봐. 내가, 내가 말야.”
“뜸 들이지 말고 이야기해 새끼야 밥 타겠다 병신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어.”
“난 또 뭐라고......”
“하하하 놀라운 일 아냐?”
“놀랍긴 하네. 너 같은 추남이 사랑하는 여자가 생기면 그 여자가 졸라리 놀랍긴 하겠네. 오우 마이 갓 지저스 저리 꺼져요 오크놈아 으허헝 이러면서 기겁 하겠다. 낄낄낄.”
“......”
오랜 기간 놈과 알고 지냈지만 익숙해지기 힘든 놈의 비아냥이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난 지금 부탁하는 입장이고, 놈은 들어주는 입장이니.
“낄낄...... 그래 말해봐 네놈이 사랑하는 여자가 생겼는데 내게 부탁할 게 뭔데? 아 아 내가 맞춰 볼까? 연애하는 법을 가르쳐줘?”
“아냐.”
“아냐? 그럼 여자가 좋아하는 데이트 코스 100선?”
“그런 거 아냐.”
“그럼 뭐야?”
“그녀가 나를 사랑하게 만들어줘.”
“......”
“왜. 안돼?”
“너를 사랑하게 만드는 법을 알려달라도 아니고 만들어 줘? 에라이 미친놈아 내가 그런 능력이 어딨어? 내가 신이라도 되는 줄 알어? 사람 맘을 이랬다 저랬다 할 수 있게?”
“그치만...... 넌 내가 대입시험 때문에 고민 할 때 내 성적을 올려 주었잖아.”
“쯧쯧쯧. 이런 병신이 있나...... 설마 너 여태껏 내가 그걸 다 이루어주었다고 생각하고 있는거야?”
“그럼......아냐?”
“네놈도 참...... 너는 그럼 네놈이 지금껏 공부해왔던 것은 뭐라고 생각하는데? 그 공부는 다 어디로 가고 내가 성적을 올려주시나? 이제보니 넌 저능아가 아니라, 자신조차 못 믿는 바보였어.”
“......”
할 말이 없었다. 아무래도 놈에게 제대로 얻어맞은 듯 했다. 곰곰이 생각해봐도 놈의 말에 반박할 어떤 것도 찾을 수 없었다. 놈의 말이 맞았다. 생각해보고 또 따지고 보면 놈이 도와주기 이전에 내 노력으로 모든 걸 해결 했었다. 그래 사실 놈에게 부탁했던 것은 모두가 나를, 내 능력을 못 믿는 나 자신의 나약함 때문이었던 거야. 그래..... 사실은 그랬던 거야.
눈부심.
눈을 뜨자마자 한여름 뙤악볕 보다도 날카로운 형광등 불빛이 내 동공을 파고들었다. 날카로운 통증에 눈꺼풀을 찡그린 것도 모자라 손을 들어 올려 눈앞을 막으려다, 따끔한 것이 손목에서 빠져나가는 고통에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신음소릴 내지르고 말았다.
“괜찮으세요?”
여자 목소리였다. 그것도 꽤 다급한. 누군지 확인하려 눈을 뜨려 했으나 아직도 형광등 빛에 익숙해지지 않은 내 눈은 자꾸만 눈꺼풀을 닫으라고 명령 질이었다.
‘씨팔’
순간 짜증이 솟구쳤다. 눈을 떴더니 좆같은 빛이 눈을 따갑게 만들고 손으로 막으려 했더니 손목이 따끔거리고, 목소리 주인공을 확인하려 했더니 눈꺼풀도 뜨지 말라니 도대체가 내 맘대로 되는게 하나도 없었다.
“누구세요.”
결국 나는 입으로 확인하는 방법을 택했다. 헌데 대답은 온데간데 없고, 우악스런 손길이 내 팔목을 잡더니 이내 또다시 따끔거리는 고통이 팔목을 억눌렀다.
“아악 뭐야! 뭐야!”
앞은 안보이고 빌어먹을 대답 없는 어떤 미친년이 팔목에 뭘 쑤셔 박는데 소릴 안지를 놈이 어딨겠는가.
“가만히 있어요! 링겔바늘 다시 꽂는거니까!”
“......”
모든 궁금증이 다 풀렸다. 이곳은 병원이고, 내게 말을 건 여자는 간호사이며 내 팔의 고통은 주사바늘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력이 회복되어 사물을 분간 할 수 있었다. 내 주위엔 응급실용 간이커튼이 둘러쳐져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강의실에서 그녀와 학과대표가 함께 들어오는 것을 본 이후로 아무 기억도 나지 않았다. 아니 그것보다 방금 전 꾼 그 꿈이 더 신경 쓰였다. 하루걸러 하루씩 꾸어오던 그림자 꿈. 꿈속의 나는 놈에게 언제나 부탁하고 있었고, 놈은 마지못해 들어주는 그런 식으로 진행되던 꿈이었다. 헌데 오늘은......
이상하게도 무언갈 얻은 느낌이 들었다. 그게 무엇일까. 꿈이, 그림자가 내게 한말은 사실이었다. 그리고 현실의 나 역시 그림자가 내게 말했던것처럼 노력으로 안 되는 것이 없다고 믿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꿈속에 나는 한없이 나약했다. 현실속의 나 역시 나약하긴 했지만, 그것을 인정하려고 하진 않았다. 다만 약간 움츠려 드는 것은 있었지만, 애써 무시하려고 했다.
“그랬던 거야.”
꿈은, 그림자는 내게 있어 안식처였던 것이다. 힘에 부치는 내가 자문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 그리고 유일한 공간. 그렇게 나는 나약한 존재였단 말이다.
깨달았다. 그리고 달라질 때다.
병원을 나왔을 땐 이미 저녁 10시가 넘어있었다. 그냥 쓰러진것 치고는 꽤나 오래 누워 있었던 셈이다. 밤공기가 제법 쌀쌀했다. 강의실 내 자리에 외투를 벗어두었는데, 아무도 챙겨주지 않았나보다.
‘빌어먹을’
이런 배타적인 세상이니 내가 어떻게 개인주의가 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그래 달라지자. 나 역시 그들을 배척하고, 피해주지 않는 선에서 이득을 챙기며 살아가자.
개인주의.
이기주의만 아니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걷는 데 목 언저리에 이따금씩 물방울이 떨어졌다. 그러는 간격이 조금씩 줄어들더니 이내 폭우가 쏟아졌다. 나는 서둘러 네온 싸인이 휘황찬란한 간판아래 몸을 숨겼다. 그렇게 몸을 숨기고 있는데 내 옆으로 낯선 커플이 옷하나를 함께 뒤집어 쓰고 다가왔다. 그러더니 서로를 쓰다듬으며 얘기했다.
“춥지?”
“응..... 추워.”
“가까이 붙어. 갑자기 왠 비지......”
“그러게 왠 비지......”
빌어먹을 광경에 눈살이 찌푸러졌다. 고개를 돌려 비를 피해 뛰어다니느라 분주한 사람들을 구경했다. 그런데 거리마다 내 옆에 있는 커플들과 같은 연놈들이 즐비했다.
한숨.
아무래도 소나기였는지 그렇게 퍼붓던 비가 언제 그랬냐는 듯 종적을 감추었다. 한바탕 소나기가 내려서 그런지 날씨는 좀 전 보다 더 쌀살해져 있었다. 나는 거리를 걷다 그냥 눈에 들어오는 옷가게 문을 열고 들어섰다. 사무적인 말투로 맞이 하는 종업원의 말을 가볍게 흘리고, 꽤나 따뜻해 보이는 오리털파카를 골라잡았다. 한겨울이 다 가서 그런지 50% 세일 이란 패키지가 붙어 있었지만 그런 걸 심사숙고 하는 주머니 사정은 아니었다. 아마 이런 면에선 날 따라올 자가 그닥 많지는 않을 것이다. 아무래도 후광은 타고 났으니까 말이다.
그렇게 옷을 계산하고 가게를 나서려는데, 가게 유리창 앞에 진열된 옷을 스치듯 보다 나는 그 자리에 우뚝 서버리고 말았다.
커플룩.
똑같은 디자인의 커플룩을 입고 있는 마네킹이 다정하게도 손을 잡고 있었다. 목 도 없어서 표정 따윈 찾아 볼 수 없을 마네킹일 지언정 아마도 가슴은 행복함으로 가득 차 있겠지.
“아가씨 저 커플티 얼마에요.”
“어머나 커플티 사시게요?”
“저기 진열 된 거 얼마에요?”
“아...... 저기 진열 된 거..... 조금 비싼데......”
“네?”
조금 비싼데...... 조금 비싼데...... 종업원의 이해할 수 없는 말이 메아리 치듯 머릿속을 헤집고 돌아다녔다.
“지금 제가 저걸 살 능력이 없어 보인단 그런 말 뜻인가요?”
“아니요 그럴리가요 호호호......”
‘죽일년 씹어삼킬년 갈아마실년’
속으로 입에 담지 못할 욕을 실컷해주었지만 그뿐이었다. 나는 백만원을 넘나드는 커플티를 예쁘게 포장하고 있는 종업원에게 카드를 내밀며 말했다.
“일시불”
“어머! 이......일시불요 네 알겠습니다.”
‘머저리 같은년 그저 돈이면 다 인줄 아는 년 네년 같은년 한타스를 가져다 주어도 나의 하나씨 발 톱 과도 비교할 수 없어’
“안녕히 가세요. 살펴가세요. 또 오세요.”
종업원은 삼단인사콤보를 날리기 전에도 계속해서 멤버쉽 카드가 어쩌고 저쩌고 날 귀찮게 해댔다. 그런 그녀의 말을 지긋이 즈려밟고 나는 거리로 나섰다. 종이가방에 담긴 고급스러운 커플룩을 하나씨와 내가 입는 상상을 하면서 사뿐사뿐 가벼운 발걸음을 계속했다. 그녀가 내 것이 될 수만 있다면, 그녀가 날 사랑해 줄 수 있다면 무엇인들 못하리요.
나는 정말 사랑에 빠진 것이 틀림 없었다.
도어록이 빙글 돌아가며 현관문이 열렸지만 집안에는 사람냄새라곤 찾아 볼 수 없었다. 아들이 쓰러져서 응글십에 실려가도 사건 한번 맡으면 얼굴 보기 힘든 승률 높은 록펌 변호사 아버지에 바람이 났는지 아버지 출장만 나가면 외출하는 어머니는 얼굴한번 비추지 않았다. 싸늘한 나무바닥을 싸늘한 마음으로 터벅터벅 걸어 2층 내방으로 올라가려는데 메리가 뒤뚱뒤뚱 거리며 내려와 나를 반겼다. 10년 가까이 내 곁을 지켜준 사랑스런 나의 친구 단하나 뿐인 친구였다.
오랜만에 메리와 함께한 거품목욕은 불안정한 내 심신을 달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녀와 학과대표의 뒤엉킨 육체의 이미지는 비누거품으로 깨끗이 닦았고, 놈과 그녀의 믿을 수 없는 루머들은 흐르는 물에 씻어버렸다.
나는 잠자리에 들기 전 생각했다. 내가 그녀라면 어떨 까. 아무래도 모든 면에서 학과대가 우월하니 놈을 택하겠지. 그렇다면 나는 놈보다 잘난 점을 만들어 내는 거다.
노력.
내게도 놈을 이길 무기는 있어.
모처럼 의욕이 넘쳐흘러 흥분되는 밤이었다. 그러나 내 들뜬 기분은 다음날 날아오는 야구공에 이유도 모른 채 깨지는 유리창처럼 산산조각나 저 깊은 내 마음속 어딘가로 곤두박질 쳐 버리고 말았다.
놈은 그녀의 손가락 사이사이 자신의 더러운 육체조직을 짜맞춰 넣고 흔들며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우리 사귀기로 했어.”
주위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오고 순식간에 강의실은 축제마당으로 둔갑해버렸다. 그러나 내겐 장례식보다도 쓸쓸한 광경이었다. 그녀는 놈과 싸구려 커플룩을 입고서도 행복한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내가, 내가 저 새끼보다 더 잘해 줄 수 있는데......”
들키지 않게, 행여나 누가 들을까 작고 그리고, 조용히 뇌까렸다.
그러나 돌아오는 건 그녀의 행복한 미소와 놈의 환희에 찬 웃음소리 뿐이었다.
절망.
첫 수능 시험에서 떨어졌을 때도 이런 기분은 아니었다. 이제 뭔가 해볼 심산 이었는데, 시작도 하기 전에 저지당한 기분이었다. 이대로 놈에게 그녀를 빼앗겨야 하는 건가. 이대로.
이를 악물었다. 처음으로 얻고 싶고, 갖고 싶은 것이 생겼는데 이대로 물러설 수 없었다. 그래 결심했던 대로 놈보다 잘난 구석을 늘려가 보는 수 밖에.
그 날 이후 나는 도서관에 틀어박혀 살다시피 했다. 옆 자리에 앉아 공부를 하던 여자가 냄새난다고 관리실에 신고를 해서 쫓겨 날 정도로 공부에 몰두 했다. 그리고 놈은 그녀와 희희낙락 하루하루를 즐겁게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첫 시험 후.
“저기 성훈아 이것좀 물어봐도 될까?”
“성훈오빠 오늘 시간 좀 되세요?”
“성훈형 저번에 빌려주신 노트요 헤헤 진짜 알짜배기던데요?”
꿀이 단데 어떻게 꿀벌들이 안모이랴. 첫 시험 이후 최고성적으로 과 톱 자리를 차지한 내 곁으론 용케도 단 내를 맡고 날아든 꿀벌들이 넘쳐흘렀다. 반면에 항상 입이 귀에 걸려 있던 학과대 녀석은 요 며칠 교수들에게 불려 다니는 듯 했다.
‘승리다.’
요번 만큼은 나의 승리였다. 이제 그녀도 나를 보는 눈 빛이 조금은 달라지겠지.
“후우......”
한숨.
“있잖냐 씨발 내가 저번에 홍대 앞 나이트를 갔는데 거기서 딱걸렸지 뭐냐. 여자친구!”
“아 서라 나는 새꺄 절대 걸릴일 없다는 명동 한복판에서 딴년이랑 손잡고 걷다가 여자친구랑 눈 마주쳤어. 그때 맞은 싸다구가 아직 얼얼하다구.”
“낄낄낄.”
“낄낄낄.”
한숨.
“후우......”
꿀벌들의 날개짓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오로지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는 그녀의 한숨소리만 들렸다.
왜.
도대체 왜.
“아 참 성훈이형 그 소식 들었어?”
“......”
나는 대답 대신 녀석을 마주보았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귀는 그녀의 한숨소리에 초점을 두고 있었다.
“서하나...... 차였다던데?”
“뭐?”
“학과대 영준이 형한테 차였다더라구.”
“자세히 말해봐.”
나는 내가 남들이 이상하게 생각 할 정도로 흥분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멈출 수 없었다.
“캠퍼스에 소문 다 난거 진짜 몰라? 서하나...... 완전 대 걸레래. 먹을만큼 먹고 버렸다는데, 나도 몰랐는데 영준이 형 알아주는 카사노바 였나봐. 근데 신입생이 뭘 알겠어. 모르고 제대로 낚인거지......”
“다시 말해볼래?”
“못 들었어? 서하나 차였다니깐.”
“아니 그거 말구.”
“뭐? 아 서하나 대 걸......”
놈은 말을 다 잇지 못했다. 내 주먹이 놈의 인중을 정확하게 가격했고, 그날 나는 처음으로 경찰서를 다녀왔다. 놈은 주머니에 하얀 종이 몇 장 찔러 넣으니 군소리 없이 돌아섰다.
“내 하나씨가......”
그녀와 놈의 이별이 반갑기만 할 수는 없었다. 나의 그녀가 고통 받고 있을 것을 생각하면 내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생각하면 할수록 놈에게 복수를 해야겠다는 결론밖에 나오질 않았다.
그녀는 놈에게 매달렸다.
하루 이틀 사흘 나흘. 시간이 가면 갈수록 그녀의 집착은 심해졌다. 처음에는 학우들이 다 보는 강의실 문 앞에서 무릎 꿇고, 양손을 비비며 그에게 잘못했다고 빌었다.
“오빠 내가 잘못했어. 뭐 땜에 그러는지는 모르겠는데 내가 다 잘못했어. 응? 나랑 이야기 좀 하자 제발......”
“너랑 할 이야기 없어. 끝났다구.”
“그러니까 왜 끝났냐구. 난 안 끝났어!”
“구차하게 이러지마 이럴수록 너만 비참해져.”
놈은 그런 식으로 계속해서 그녀를 외면했고, 그녀는 하루가 다르게 초췌해져 갔다. 그런 그녈 바라보는 내 마음은 오죽했겠는가.
나는 놈에게 복수를 다짐했다.
‘내 그녀를 저렇게 만든 네놈을 기필코 가만 두지 않으리라......’
기회는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놈은 외향적인 성격이라 잠시도 집에 붙어 있지 않았는데, 중요한건 놈은 절대 혼자다니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언제나 직업여성처럼 향수 대신 색기를 뿌리고 다니는 듯한 여자들을 양옆에 끼고 다녔다. 좀처럼 기회를 잡지 못하고 있던 나는 놈이 웬일로 차를 두고 으슥한 골목으로 이동하는 틈을 타 놈에게 접근했다.
나는 숨을 고르고 손에 쥔 날카롭게 깨어진 유리병을 머리 위로 치켜들고 슬금슬금 도둑고양이처럼 놈에게 접근했다. 그때였다. 으슥한 골목사이로 갑자기 그녀가 나타났다. 예의 아름다움과 생기넘치던 그녀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다. 다만 목소리와 머리길이 그리고 어느정도의 외형정도로 그녀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녀는 매말랐고, 초췌했으며, 죽은 이의 그것처럼 생기가 없었다.
“미쳤어? 왜 자꾸 귀찮게 해?”
“말 해줘...... 이유를 말 해줘. 날 버린 이유.”
“너도 참. 그만큼 알아듣게 얘기했음 된거 아냐? 이유가 어딨어? 그냥 남녀사이 사랑식으면 끝인거지.”
“그런게 어딨어. 난 아직 오빠 사랑하는데 오빠혼자 마음대로 그런게 어딨어!”
그녀는 그렇게 소리치며 놈에게 한 발짝 다가섰다.
“씨팔! 미친년 더 이상 못해먹겠네. 내가 씨발 학교 이미지도 있고 그래서 말 안하려고 했는데, 이유? 그래 씨팔 가르쳐 주지.”
그 이후로 놈의 입에서 나온 발언은 상상을 초월하는 그것이었다.
쓰레기.
놈을 표현 할 수 있는 단어는 그것만한게 없을 것이다.
“신입생 환영회 할 때 기억하지? 그때 친구들이랑 내기 하날 했어. 백만원 걸고, 내가 너 열흘 안에 따먹나 못 따먹나. 근데 씨팔 존나 웃긴게 당일 날 바로 대주더구만? 근데 그게 또 맛이 끝내주더라구. 썅년아 그래서 좀 더 따먹어 보려구. 돈이 좀 아깝긴 했지만 커플티 까지 사가며 사귀는 척 한거야. 자 이제 됐지? 진짜 이유를 알았으니 시원하지? 나 너 좋았어. 네년 배 위에 올라타는 거 진짜 좋았어. 근데 어쩌냐 질리는데.”
“거, 거짓말......”
그녀는 적잖이 충격을 먹었는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나 역시 놈이 내뱉은 충격적인 발언들에 숨죽여 울고 있었다. 나의 서하나가 겨우 저딴 놈에게 하룻밤 아랫도리 장난감 정도밖에 안됐다니.
“야 그리구 씨팔 너 사람 시켰어? 나 미행하라구 사람 시켰냐구. 너같은 스토커년도 귀찮아 죽겠는데. 요 며칠 어떤 개새끼가 계속 따라다니더라? 내가 또 성격이 안 그래서 남 손 안 빌리거든? 연놈들 잘 걸렸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이었다. 놈이 갑작스레 내게 다가와 내 멱살을 잡고 날 바닥에 내동댕이 쳐버렸다. 차갑디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에 구르며 이곳저곳에 까진 상처가 났다. 상처부위로 빨갛게 피가 올라오는 모습을 확인하려는데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놈이 구둣발로 내 얼굴을 가격했나 보다.
“개 씨팔 새끼 너였냐? 왜 그 잘난 성적표로 교수들 앞에서 재롱 떠니까 내가 우스워 보이든? 생긴 것도 좆 같은게, 진짜 잘들 논다. 어후 씨팔 기분 좆같네. 오늘 좀 맞아야겠다 너.”
사방에서 불꽃이 튀었다. 극심한 고통이 하복부를 짓누르면 곧이어 대퇴부를 향하고 지나가면 또다시 정강이를 찾아왔다. 그렇게 신물나게 맞고 나니 정신마저 아득해졌다.
“어후 씨팔 기분 좆같네 진짜. 야 걸레년아 사람 쓰려면 이런 새끼 쓰지말구 조폭같은놈을 보내. 그래야 내가 장단이라도 맞춰줄거 아냐. 아 별 그지같은 퉷!”
놈은 그렇게 내 얼굴에 가래침을 뱉더니 골목길 으슥한 곳으로 사라졌다.
“흐.....흑,흐흐흑......”
멍이 심하게 들었는지, 부어올랐는지, 아니면 실명을 해서 그런지 눈앞이 선명하게 보이지 않았다. 초점 잃은 렌즈처럼 아른거리기만 했다. 그런 불명확한 시야로 주위를 살피자 사람형체 같은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녀였다. 울고있는.
“하......하나씨......”
부들 부들 떨리는 힘 없는 손가락을 그녀를 향해 뻗었다. 어느 상처에서 흘러나온지 알 수 없는 핏물이 손가락을 타고 뚝뚝 떨어졌다. 따라서 그녀의 눈물도 뚝뚝 떨어졌다.
나는 치가 떨릴 정도의 고통으로 온몸이 짜부라드는 기분 속에서도 그녀이름을 불러댔다. 놈은 당신을 버렸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줬으니 내 손을 잡아 달라고......
“가......”
“.....?”
“가! 너 때문이야! 너 때문에 오빠가 가버린 거라구!”
어둠. 좌절. 침식.
저 어둠의 끝은 어디인가. 절망의 끝은 또 어디인가. 나는 그 끝에 가라앉아 끝없는 세월 속에 침식 되리라. 내 가슴은 다시는 움직이지 못하리라.
실신.
온통 어둠뿐이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0차원속의 어둠의 점만이 나를 반겼다. 그리고 어둠의 저편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그림자다.
“왜 그렇게 힘들어 하나?”
“네 말이 틀렸어. 이젠 끝이야.”
“노력으로 안되는 게 있다는 것을 안 모양이군. 미안하지만 나는 권유했을 뿐 네게 그렇게 하라고 하진 않았잖아.”
“어쨌든 다 끝났다구!”
“힘든가?”
“말 할 수 없을 만큼......”
“그치만 말야. 사람은 살면서 누구나 그만한 고통은 하나 쯤 떠안고 살고 있다구.”
“......”
“잘 생각해봐. 네 놈은 돈이 없어 연탄불에 추운 겨울을 나다 연탄가스에 딸을 잃은 부모의 고통을 모르잖아. 고아들의 부모에 대한 그리움도, 집이 없어 신문지 덮고 자는 저 역 앞에 노숙자들의 추위도 모르잖아? 그렇듯이 남들도 제마다 하나쯤은 그런 고통을 안고 살아 간다구. 넌 네가 받고 있는 고통이 세상에서 제일 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절대 아니란거야.”
“그게 지금 무슨 상관이지? 그들은 그들이고 난 나야. 난 지금 힘들어 미쳐버릴 것 같다구.”
“이봐 내 얘길......”
“죽고 싶어.”
“이, 이봐 정신차려.”
“그냥 이대로 죽어버리고 싶어. 내 사랑하는 그녀에게 그런 말을 듣는 심정을 네가 알아? 그 눈빛. 마치 날 바퀴벌레 보듯 했어. 네가 그 기분을 아냐구!”
침묵.
나도 그림자도 침묵했다. 그렇게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눈이 어느정도 어둠에 익숙해졌을 법 한데도, 한치 앞이 보이지 않았다.
먼저 정적을 깬건 그림자였다.
“하는 수 없군. 네놈이 죽으면 나도 사라지니 그렇게 내 버려 둘 순 없고......”
“......”
“그녀가...... 널 사랑하도록 도와주지.”
“그게 정말이야?”
“그래. 도와주지. 하지만 뒤에 무슨 일이 벌어질진 나도 몰라.”
“그게 무슨 상관이야. 그녀가 날 사랑 해준다면 난 내 사지라도 잘라 줄 수 있어”
“병신...... 미친 건 알고 있었는데, 상상이상이구만...... 쯧 아무튼 네놈이 죽으면 나도 곤란하니깐 도와주겠다는 이야기야.”
“그래 어떻게 하면 그녀 마음을 얻을 수 있지?”
“최면.”
“최면? 정말 그런 걸로 그녀의 마음을 얻을 수 있어?”
“Hyponosis. 너도 책 좀 잡은 놈이니 들어 봤을 거라 생각한다. 난 너에게 해결책을 줬어. 이제부터 어떻게 할 지는 네가 정하는거야”
“최면......최면이라......”
깨어남.
몸을 비트는 고통 속에 눈을 떴어도, 신음 소리 한번 내지 않았다. 그 정도의 외상이 내상을 이기지는 못하니까. 나는 숨 막히는 가슴을 한손으로 부여잡고, 한손은 병원침대를 붙잡은 채로 한 참을 소리 없이 울었다.
“끄윽......끄윽......헉,헉,헉 끄흐윽......”
지난 밤의 일이 방금 전의 일 처럼 가깝게 느껴졌다.
그녀의 눈물, 그녀의 원망, 그녀의 경멸 그 모든 것들은 놈이 아닌 나를 향하고 있었다.
‘최면’
간 밤의 꿈이 상기된 것은 한 참을 패닉상태에 빠져 멍해있다 누군가 내 이름을 부름과 동시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나는 고갤 들어 날 부른 이를 보는 대신, 뼈마디마디가 욱신거려 잘 움직이지 않는 다릴 힘겹게 이끌어 병원 한쪽 구석에 마련되어 있는 PC방으로 향했다.
최면.
Hyponosis, Rapport, 유도자, 피험자, 각성, 수면이완.
도통 모를 말들만 나열 되어 있는 모니터 앞에서 머릴 싸매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눈에 들어오는 문구가 있었다.
[최면을 걸어드립니다.]
문구를 보자마자 나도 모르게 이거다 라는 알 수 없는 확신 이 들었다. 어디서 그런 확신이 선 건지는 알 수 없지만 모종의 기대감이 만들어낸 착각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문구가 적힌 블로그를 클릭하고 나서 나는 그 기대를 구깃구깃 구겨서 쓰레기통에 쳐 넣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010-xxxx-xxxx
블로그엔 전화번호 단 하나 만이 적혀 있을 뿐이었다.
도대체 밑도 끝도 없이 전화번호 하나 덩그러니 있는건 무슨 의미란 말인가. 하지만 마음 속에서는 아직도 이유를 알 수 없는 확신이 전화를 걸라고 부추기고 있었다.
걸었다.
신호음이 가는 순간에도 나는 이게 뭐하는 짓인지 후회했다. 그러나 그 후회는 신호음이 끊기고 수화기에서 낯선이의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사라져버렸다.
“신림동 382-341번지”
“네?”
걸걸한 보이스의 소유자였다. 목소리만 들어선 남잔지 여잔지 늙다린지 영계인지 추측이 불가능한 특이한 목소리였다. 그런데 다짜고짜 주소를 알려주는건 뭐란 말인가.
“최면 때문에 전화 건거잖아 일루 와.”
“아......예”
전화를 끊고도 한 참이나 이성적인 판단이 안 섰다. 정말로 걸걸한 보이스가 시킨대로 해야 될지 말이다. 허나 어차피 물은 다 엎질러졌고, 소중한 그림을 그려나가던 내 캔버스는 물에 흠뻑 젖어 찢어지기 직전이 아니던가. 수건으로 못 닦으면 말려라도 봐야지.
“신림동이요”
무턱대고 아픈 몸을 이끌고, 신림동으로 향했다. 도대체가 앞 뒤가 맞지 않았다. 전화 내용도 그렇고, 내가 지금 해야 할 일은 몸을 추스르는 거였다. 지금 이 순간 모든 것들이 날 중심으로 뒤죽박죽 섞이고 있는 듯했다. 고무찰흙에 고무찰흙이 섞이고 거기에 또다른 고무찰흙이 섞여 요상한 색깔이 나올 때 즈음 꼬마아이는 자신의 무지함을 후회한다.
나는 지금 그 꼬마아이가 된 기분이다.
막상 신림동에 도착은 했지만 어디서부터 주소지를 찾아야 할지 막막했다. 나는 무턱대고 주소지를 찾기 시작했다. 그냥 다시 전화를 걸어 볼까 하다가 문득 안그래도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서 관두었다.
나는 벽에 문짝 하나 달랑 있는 반 지하 집을 지나쳐 큰 감나무가 자리한 대문의 주소를 읽어보려다 문득 이상한 느낌이 들어 반 지하방 근처를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누군가 크레파스로 장난스레 낙서해둔 듯한 주소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382-341.
우연의 일치치곤 기묘한 일이었다. 이 넓은 신림동에서 처음 지나친 곳이 바로 그곳이라니. 나는 다 낡아 빠진 문을 행여나 부서질까 손가락으로 툭툭 치며 문 건너편에 있을 누군가에게 물으려 했다.
"들어와.“
“계세요.”
뭔가 잘못 됐다. 내가 물어보는 게 먼저여야 정상인데 들어오란 말 이 먼저 들렸다. 내가 온 걸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나는 조심스레 내 어깨 까지 밖에 올라오지 않는 문을 열었다. 다 낡아 떨어지려던 경첩은 내가 문을 염과 동시에 틱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 부러졌다.
충분히 보상할 능력은 있지만 이상하게도 큰 죄를 저지른 것만 같은 생각이 들어 연신 죄송하단 말을 해댔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나중에 배상해드릴게요.”
“잔말 말구 들어와”
걸걸한 보이스는 한사코 내게 들어올 것을 요했다. 나는 목소리를 찾아 반지하 방으로 들어섰다. 계단을 세 개쯤 내려갔을까 머리 바로 앞에서 백열전구가 켜졌다. 하마터면 놀라 자빠질 뻔했다.
“이쪽이야.”
나는 목소리가 들리는 곳을 응시했다. 그러나 갑작스레 켜졌던 백열전구의 필라멘트가 잔상이 되어 눈앞에서 아른거려서 그런지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감정이 심화된 모양이군.”
“네?”
나는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목소리의 말과 함께 백열전구가 다시 꺼져버렸기 때문이었다.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마음속을 서서히 잠식해갈 무렵 목소리는 다시 말했다.
“감정이 심화됐어. 수많은 감정 중 단 한가지의 감정에 너무 몰입하고 있다구. 아무래도 사랑이겠지.”
“그.....그걸......”
최면술사가 점쟁이란 소린 들어본 적도 없다. 그런데 놀랄 일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아가씨는 당신을 벌레보듯 하는구만. 어렵군 어려워.”
“어떻게 아시는거죠?”
“궁금한가?”
“하하......네......”
“미안하지만 못가르쳐준다네.”
“......”
“단, 자네가 원하는 것을 해줄 순 있지. 아가씨에게 사랑이란 감정을 심어줄 수 있어 그것도 자넬 향한!”
터무니도 없고, 밑도 끝도 없고, 앞 뒤도 안 맞는 걸걸한 목소리의 말이 희한하게도 설득력있게 다가 왔다. 내가 너무 갈 데 까지 간 상황이라 이런 썩어빠진 동아줄 같은 허황된 것에 의지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때 솔깃하지?”
“네 정말루요......”
“그래 그래 그럴 줄 알고 있었어.”
“조건도 있을 테죠.”
“크하하하 역시 세상을 아는 놈이야.”
걸걸한 목소리의 웃음소리가 좁은 반지하방에 한 가득 퍼졌다. 나는 혹시 이 자가 b급 영화 속에나 나오는 괴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만큼 웃음소리가 괴기했다.
“돈 인가요?”
그렇게 물어보면서도 왠지 아닐 것 같다는 기분이 강하게 들었다. 돈을 원하는 사람은 믿음이 안가기 때문에 내 마음속 어딘가에서 이자를 마지막 희망이라고 여기고 있는 지도 몰랐다. 그러니 그가 다른 것을 원하길 바라는 것일지도.
“아니야.”
조금은 안도되었다.
“그럼 뭐죠?”
“유희. 나의 유희.”
“유희?”
어처구니가 없었다. 조건이 자신의 유희라니. 혹시.
“그딴 상상 하지마. 그런 것 아니니까.”
보기 좋게 빗나갔지만 오히려 그런 쪽이 아니라면 다행이었다. 목소리로 봐서는 남자일 가능성이 여자일 가능성보다 높은 듯했으니까.
“그럼 무슨 뜻이죠?”
“그걸 가르쳐주면 재미가 없어. 어차피 당신이 원하는 것만 주면 당신은 뭐든 할테니 상관 없지 않나?”
“그......그렇긴 하죠. 저는 그녀와 저를 영원히 사랑해 주었으면 좋겠는 걸요.”
조금은 꺼림칙했지만 그렇게 원하고 바라고, 꿈에서도 잊지 못하는 그녀를 얻을 수만 있다면 진작부터 모든 걸 바칠 수도 있었다.
“방금 한말 책임 질수 있겠지?”
“당연하죠.”
“그렇다면 거래 성사야. 금방 소식 올테니 돌아가서 기다리라구.”
나는 그렇게 돌아섰다. 어째서인지 반지하방을 나가는 것이 들어갈 때 보다 훨씬 더 찝찝했다. 막 문을 닫고 나서려는데 뒤에서 어렴풋이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넌 네 말에 책임 못져...... 그래야 내가 재밌어 지거든 낄낄낄......”
나는 문을 닫고 난후 그길로 달음박질 쳤다. 더 있다간 뭔가가 나를 해할 것만 같아 더는 그곳에 서있을 수 조차 없었다. 얼마나 뛰었을까 그제서야 내가 환자복을 입고 있는 환자라는 사실을 자각했다.
“끄윽......”
다리가 너무 아파 신음소리가 새어나올 지경이었다. 그런 고통속에서도 달음박질 쳤다니 날 뛰게 만든 그 불안감이 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이튿날 아침 나는 간밤에 내가 한 일이 현실인지조차 자각하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만큼 현실성이 떨어지는 경험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병실에 누워 있는데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아버지였다. 도무지 받고 싶은 기분이 들질 않았다. 아들이 병원에 입원했는데 찾아오긴 커녕 이틀이 지난 후 인데도 전화 한통이 고작이라니.
휴대폰은 세 번이나 더 울렸다. 잠잠해지나 싶었는데 또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에이 씨......”
배터리를 뽑아버릴 심산으로 휴대폰을 집었는데, 휴대폰 액정에 처음 보는 전화번호가 발신자 표시에 떠있었다.
“누구지......”
내 휴대폰에 저장 되어 있는 이는 어머니와 아버지 단 두 분 뿐이었다. 누구에게도 전화번호를 가르쳐 준 적이 없었다. 나는 고심하다 받지 않기로 했다. 왠지 안 좋은 일에 말려 들것 같은 일종의 불안감 때문 이었다. 휴대폰은 그렇게 수번 더 울리더니 잠잠해졌다.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그렇게 자신을 알리고 싶어 하는 자가 누군지 나는 메시지를 확인했다. 그리고 나는 순간 내 눈을 의심했다. 메시지 내용은 이러했다.
-성훈씨 잘 계세요? 저 하나에요 서하나. 아무래도 제가 성훈씨에게 못할 말을 한 것 같아서요..... 연락 기다릴게요.-
믿을 수 없는 내용이었다. 그녀가, 내게, 미안해하고 있다니. 나는 속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환희에 몸서리 쳤다. 그러다 문득 지난 밤의 일이 생각났다.
‘설마......’
반신반의.
정말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엔 참으로 이상한 일들이 많이 벌어지니 만약에 진짜라 그래도 별로 특별 할 건 없었다. 하루에도 수십번씩 UFO가 날아다닌 다는 기사가 뜨고, 백두산 천지에 괴물이 고기를 잡아먹기도 하고, 히말라야 산맥에 설인이 뛰어 다니기도 하니깐 말이다. 그래도 사람들은 별 놀람 없이 제 할일만 하면서 살아가지 않은가. 그러니 이런 일이 벌어진들 놀랄 껀덕지가 있겠냐 말이다. 그리고, 그녀가 연락을 취해온 게 사과만 하려는 의도인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수화기를 든 손이 긴장으로 뻣뻣해진다. 참 아무짝에도 쓸 모 없는 몸이다. 나는 몇 번이나 실수한 끝에 겨우 그녀의 번호를 누를 수 있었다. 술을 마신 것도 아닌데 수전증이 도졌다.
뚜루루루.
신호음이 내 심박과 함께 박자를 맞춰 리듬을 만들어 낸다.
쿵. 뚜루루루. 쿵. 뚜루루루.
“여보세요?”
여전히 나비 나풀거리듯 고운 목소리다.
“서 하나 씨......?”
“성훈씨죠? 그렇죠?”
“네......”
“아, 뭐부터 말씀을 드려야 할지...... 그저껜 정말 죄송했어요. 그러려는 마음은 없었었는데...... 저도 모르게 그런 심한 말을 했네요.”
“그럴 수도 있죠......”
‘그럴 수 없지. 네가 내 맘을 안다면.’
자유로운 생각과는 다르게 굳어버린 입술은 자꾸만 뻣뻣한 말들만 내뱉는다. 긴장이 극에 달해 입에 침이 마르고, 헛기침만 계속해서 나온다.
“아니에요. 정말 미안해요. 그 자식한테 당하고도 정신 못차리구...... 제가 너무 한심하죠?”
“아뇨. 하나도 안 한심해요 하나도......”
“그래요?...... 고마워요. 이런 저를 좋아해주셔서......”
“네...... 네?!”
이런 상황은 생각해 본 적 이 없었다. 적어도 방금 전까지는 말이다. 나는 그 누구에게도 내가 그녈 좋아하고 있노라 라고 말한 적이 없었다. 아니 내 친구 메리는 제외다. 말 못하는 개니까.
“알고 있었어요. 나중에 친구한테 들은 이야기지만 성훈씨가 제 소문 듣고 화냈다는 이야기도 들었구, 또 그 자식 미행했던거, 제 복수 해주려고 그랬던 거죠? 그래서 더 미안해요. 다 알면서 어떻게 제 입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
“......”
갑자기 속에서 뜨거운 것이 솟구쳤다. 눈시울은 붉어졌으며, 북받쳐 오르는 감정이 주체되지 않았다. 그동안의 내 억눌렀던 설움이 한낱 염분 섞인 물방울이 되어 내 볼을 흘렀다. 그리고 그녀에 대한 미움도 깨끗이 씻겨 내려갔다.
“성훈 씨 지금 어디세요?”
“네?...... 아 지금 병원이요.”
“병원이요? 역시...... 많이 다치셨구나. 저 때문에...... 무슨 병원이에요?”
“설마......”
“아직 밥 안드셨죠. 제가 죽 사들구 갈게요. 어느 병원이에요?”
“안돼요!”
그렇게 말해 놓고도 왜 안돼는지 딱히 핑계거리가 없었다. 핑계가 아닌 진실은 더더욱 말 할 수 없었다. 진실이, 지금 당신을 볼 수 없는 이유가 내가 너무 초라해서, 내 몰골이 너무 추레해서 라고 말할 수 없었다.
“왜......그러죠?”
“아무튼 지, 지금은 안되요 다음에...... 다음에 저 다 낫구 나면 그때......”
“저 보기 싫으시구나...... 하긴 그렇겠죠. 그런 심한 말을 했으니......”
“아니요! 절대 그런거 아니에요. 그런거 아니니까 오해 하지 마요. 다음에 아무튼 제가 다음에 연락하면 그때......”
“네...... 알겠어요. 그럼 다음엔 사과할 기회 주셔야 해요.”
“네......”
그렇게 그녀와의 첫 대화는 끊어졌다. 별 대화도 없었다. 그러나 들뜬 기분을 주체 할 수 없었다. 그녀가 자의로 내게 오려고 했고, 그녀가 날 위해 죽을 사 오려고 했으며, 사과하려고 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건 그놈. 학과대 그놈을 그 자식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드디어 내게도 기회가 왔음은 물론이고, 성가신 놈도 없어졌다. 그렇게 생각하니 꼭 그녀가 내것이 된 것만 같은 착각이 일었다. ‘장성훈. 너무 오버하지 말고, 앞으로 어떻게 할지 생각하자.’
나는 그렇게 속으로 다짐했다. 더 이상의 실패는 용납이 되질 않기 때문이었다. 그래 이번이 마지막 이었다. 마지막 기회.
입원 한지 열흘도 채 안됐지만 의사는 너그러운 웃음을 지으며 퇴원해도 좋다고 했다. 항상 웃고 다니는 자는 몸도 건강해 진다더니 정말 그런가보다. 요 근래 입에서 미소가 가시지 않는다. 아마도 그녀 때문이겠지. 사실 입원해 있는 기간 동안 그녀에게서 몇 번의 연락이 더 왔다. 그 때마다 이 핑계 저 핑계로 그녀와의 만남을 미루어 왔는데, 이제는 그럴 핑계거리가 다 떨어지고 없었다. 나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왜 그녀와의 만남을 미루는지. 해답은 한가지 밖에 없었다. 내게 자신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지 말자고 다짐하고 또 다짐 해놓고도 아직......”
내 나약함의 산물인 꿈속의 그림자는 늘 날 질타해왔다. 그런 이유는 분명 나약한 나 자신에게 있었던 것일 터였다.
‘이제 용기를 내고, 꿈속의 그림자에게 의지하지 않을 때도 됐잖아. 오로지 내 힘으로 모든 걸 해낼 자신 있잖아.’
그날 꿈에는 그림자가 등장하지 않았다.
띠리리링.
요란한 전화벨 소리에 부스스한 눈을 깼을 때 메리는 내 발가락을 핥고 있었다. 어찌나 맛있게 핥던지 더 자고 있다간 먹이로 착각하고 씹어버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네 여보세요.”
“저 하나에요. 자다 일어났어요?”
“아 하나씨......”
나는 자다 일어나 부스스한 정신상태로 핑계거릴 찾기 시작했다. 그러다 문득 어제 했던 다짐이 떠올랐다.
“저기 하나씨.”
“네?”
‘용기를 내! 용기를!’
“저......오늘 시간 좀 있으세요.....?”
“오늘요? 당연하죠!”
“아 하하...... 그럼 오늘 저녁식사라두 같이 하실래요?”
“좋죠 저야 당연히 좋죠! 어디서요? 네?”
“대학가에 공원 벤치 있죠. 거기서 다섯시반에 만나요. 거기가서 뭐 먹을지 정해요.”
“네! 그럼 나중에 연락해요!”
뚝.
“아싸!”
나는 나도 모르게 침대 위에서 날 뛰고 있었다. 나도 무언가 해냈다는 승리감에 도취되어 내 덩치만한 메리를 끌어안고 침대 위를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돌침대인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 갈수록 초조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나는 미용에 신경을 써본 일이 없어서 아직도 90년대 5대5가르마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헤어 정발용품은 발라 본 적도 없었고, 왕방울만한 뿔테 안경은 어찌나 촌스러운지 걱정이 되어 죽을 맛이었다.
“이렇게 나가서 하나씰 만났다간 누구든 전차남을 연상 시킬거야.”
전차남은 오타쿠와 미녀의 러브스토리를 그린 영화의 제목이었다. 남들 시선에 그렇게 보이면 절대로 안 될 터였다. 대책을 세워야 했다.
결국 나는 아버지가 주신 골드카드를 챙겨 시내로 향했다. 처음 향한 곳은 미용실 이었다. 항상 이발소만 가던 나로선 미용실을 출입하는 것도 용기를 내야만 했다. 젊은 여자들이 솜씨 좋게 머리를 손봐줬고, 제 모양이 갖추어 지자 그럭저럭 볼만한 머리모양이 나왔다. 그리고 나선 옷가게를 향했다. 아무래도 스타일이란 걸 잘 모르는 나 다 보니 제일 무난한 정장을 택했다. 양복점에 가자 기다렸다는 듯이 양복쟁이가 다가와서 이리저리 치수를 재더니 볼만한 정장을 한 벌 빼왔다. 그리곤 안경점과 구둣가게에 들려 최대한 심플한 디자인으로 멋을 냈다.
거울.
“이게 누구야.....”
확실히 옷이 날개란 말은 허투루 내뱉는 말은 아니었다. 확실히 달라진 내 모습에 나도 어안이 벙벙했다. 그녀에 비하면 못미치는 건 사실이지만 이정도면 어디에 내놔도 손색은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내 생각이지만 말이다.
시계를 보니 어느새 다섯 시가 다되어가고 있었다. 나는 서둘러 택시에 올라탔다. 번잡한 시간대에 약속을 잡은 것을 후회하고 있는데, 아니나 다를까 차가 막히기 시작했다.
차창 밖이 서서히 어두워져서 해가 지나보다 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웬걸 먹구름이 하늘가득 끼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한바탕 폭우를 쏟기 시작했다. 그녀와 나의 첫 만남을 저주라도 하는 건지 하늘이 원망스러웠다.
약속장소에 도착하니 희한하게도 비가 딱 그쳤다. 택시비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이 나왔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나는 멀찌감치 떨어진 공원 벤치를 무의식적으로 보았다. 그리고 거기에 오롯이 앉아있는 한 여자를 발견했다.
“정말 그녀가 맞구나......”
그렇게 혼잣말을 내뱉다가 아차 하는 생각에 나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비가 왔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비에 젖어서 부들 부들 떨고 있었다.
“하나씨!”
“성훈씨!”
나는 그녀에게로 다가가서 얼른 손수건을 내밀었다. 조그마한 손수건으로 다 닦일 리는 없지만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것이 전부였다.
“왜 비를 맞고 계셨어요!”
“30분에 온다고 하셔서......”
그제 서야 난 시계를 봤다. 40분...... 그녈 만난다는 기분에 들떠 약속시간도 잊고 있었던 것이다.
“정말 미안해요. 늦으려고 한게 아니라, 차가 밀려서...... 핑계라고 생각하실지 몰라요. 그런데 아무튼......”
“괜찮아요.”
“미안해요.”
너무 미안한 나머지 횡설수설 하는 내 말을 끊고, 그녀가 온화하게 웃으며 내뱉은 한마디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모든 게 다 내 잘못만 같았다. 지난 시간 그녀를 아프게 했던 놈의 잘못도 내 것인 것 같았고, 내 마음을 짓밟았던 그녀의 외침도 내 잘못인 것만 같았다.
나는 서둘러 그녀를 데리고 옷가게로 향했다. 이런 상황을 겪어본 게 처음이라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랐다. 그래서 나는 그냥 그녀에게 옷 한 벌을 선물해버렸다. 그녀는 처음 보는데 이런 선물 받는 건 경우가 아니라며 한사코 거절했지만 나는 10분 늦은걸 이유로 모른체 해버렸다. 어쩌면 10분 늦은 건 내게 기회가 되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쿠쿵.
먹구름사이로 번개가 번쩍이나 싶더니 천둥소리가 요란하게 대지를 뒤틀었다. 나는 편의점에 들어서서 우산 두개를 샀다. 알록달록한 무늬가 인상적인 우산이었다. 우산을 구입하고 나서기가 무섭게 또다시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나는 우산을 펼쳐들고 그녀의 손에 쥐어주려 했다. 그런데 그녀가 갑자기 내 팔 안으로 팔짱을 끼는 게 아닌가. 순간 심장이 터져버릴 듯이 요동쳤다. 내 고지식한 관념으로 볼 땐 이것은 분명 연인 사이나 하는 짓거리였다.
“배고파요 밥부터 먹으러 가요.”
“그......그래요.”
남자란 참 단순한 동물이라더니 틀린 말은 아니었나보다. 묵직해진 아랫도리 때문에 자꾸만 시선이 아래쪽을 향했다. 행여나 남이 보고 비웃기라도 할까봐 계속 해서 신경이 쓰였다. 정말 난처했다.
“저......저기 저기루 가죠.”
딱 봐도 맛없어 보이는 보라색 간판에 ‘한식집’ 달랑 세 글자 써있는 음식점 이었다. 도대체 저런 작명 센스는 누가 가졌는지 얼굴이 궁금할 지경이었다. 아무튼 지금은 그런 소소한것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어서 아랫도릴 수습해야 했기에 그녀를 내 옆에서 떨어트려 놔야했다.
“저기 맛 없을 것 같아요. 다른데.”
“......”
숨이 넘어갈 것만 같았다. 어느 연애지침서에도 이런 상황에 대해서는 언급되어 있지 않을 것이다. 마음속으로 경건한 노래를 읊어보기도 하고 김소월의 시 한 소절을 읊기도 했다.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진정이 되질 않았다.
“저기로 가요.”
그녀가 손짓한 곳은 닭요리로 유명한 곳이었다. 나는 그곳이 닭요리집이든 계란 요리집이든 상관없었다. 서둘러서 그곳으로 들어갔다.
“후우......”
절로 한숨이 새어나왔다. 자리에 앉아서도 한동안 가라앉을 생각을 안 하던 그게, 음식이 나올 때 즈음에야 가라앉았다.
“그러니까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요......”
“아 네......”
“재밌죠!"
“네 재밌어요.”
시시콜콜하고 사소한 이야기들로 가득 찬 식사였다. 주위 여러 테이블엔 연인들의 웃음소리가 넘쳐흘렀지만, 어디도 우리보다 즐거워 보이지 않았다. 이런 것이 행복이란 거구나. 새삼 깨달았다. 그날 나는 그녀와 공포영화도 보고 카페에서 진한 커피를 음미하며 다른 여느 커플들과 비슷한 데이트를 했다. 아주 자연스럽게.
“오늘 즐거웠어요.”
“정말요? 저두요. 괜히 저 때문에 비싼 옷 사시구 돈 너무 많이 쓰신거 아니에요?”
“아니에요. 제가 늦어서 옷이 젖었으니 당연한걸 해드렸는 걸요.”
“그래도 꽤 비싼것 같던데......”
“얼마 안하던데요 뭐.”
“제가 그럼 성훈씨가 사준 이옷 닳을 때 까지 계속 입구 다닐 게요. 잘 때도 잠옷으로 입고 자고.”
“레이스 달린 그 불편한 옷을요?”
“잠옷은 좀 그런가......?”
“하하하.”
“호호호.”
그녀와의 통화는 즐거운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도무지 며칠 전까지 다른 이 때문에 고통 받던 사람 같은 느낌이 들지 않았다. 별로 대수롭지 않게 넘어 갈 수 있었지만 왠지 그녀에게서 묘한 이질감이 느껴졌다.
그녀와의 전화통화는 꽤 오랜 시간 지속되었다.
“저기 있죠 성훈씨.”
“네?”
“저기 이런 말 제가 하면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
“저 많이 생각해 봤어요. 짧은 시간 이었지만 성훈씨 몸 쾌유 하는 동안 많이 생각했어요..... 저도 솔직한 심정으로 그 사람 때문에 상처 받은 마음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구요. 그동안 성훈씨 마음 아파했던거 전부다 제가...... 사랑해줘서 갚아 주고 싶구요.”
“......”
그녀의 입에서 날 향한 사랑이란 말이 나왔다. 저 먼 우주 속에 떠다니는 UFO를 몰고 있는 외계인을 사진으로 찍었다고 해도 이보다 더 비 현실 적이진 않을 것이다.
“그래서 말인데, 제가 성훈씨 사랑해도 될까요?”
“하나씨......”
어쩌면 나보다 도 더 용기 있는 그녀였다. 내가 그토록 입에 담고 싶어 했던 고백이었거늘, 그녀에게 빼앗겨서 조금 아쉽긴 하지만 뭐 어떤가. 내가 그토록 원했던 것을 드디어 얻었는데.
“하나씨...... 제가 할 말이에요.”
그렇게 우리는 연인이 되었다. 그 날 이후로 하루 중 거의 모든 일을 함께 하게 되었다. 때때로 캠퍼스 내에서 나와 그녀에 관한 뒤 찜찜한 이야기들이 나돌곤 했지만 의식하지 않았다. 그것이 나와 그녀에게 유익한 이야기는 절대 아닐 테니 말이다. 우린 미녀와 야수 같은 커플 이었다. 그녀는 나와 함께 있는 시간에도 가끔씩 다른 남자에게 고백을 듣기도 했고, 나는 그녀가 날 이유로 거절하는 모습을 볼 때 마다 정말 저 예쁜 여자가 내 연인이 맞는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그건 그녀에게 고백하던 숱한 남자들의 머릿속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우린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서로에게 익숙해져갔고, 자연스레 스킨쉽도 하게 되었다. 그녀의 처음이 되어 주지 못해 못내 아쉽긴 했지만, 내게 있어 그녀와 함께 하는 모든 것들은 모두 처음이란 의미가 담겨 있었다. 그녀의 손을 잡는 것도, 입맞춤도, 첫키스도 그리고 첫경험도.
“자기야. 지금 어디야?”
“지금? 집인데 왜?”
“지금 자기네 집에 가두 돼?”
“응 상관없어.”
나와 그녀는 서로의 집까지 오가는 사이가 되었다. 처음 그녀를 품에 안았을 땐 정말 이세상의 모든 걸 다 가진 기분이었다. 처음이라 어색해 하는 나를 안고서 사랑한다며 속삭였던 그녀. 그녀와의 사랑이 절정에 다다랐을 때 그녀의 깊은 곳에 내 모든 것을 준 그 순간 그 기분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 이후 나는 그녀와 수도 없이 사랑을 나누었고, 우린 약혼을 언약하기에 이르렀다.
“자기야.”
“응?”
그녀가 애교 섞인 목소리로 날 불렀다. 침대 에 걸터앉아 책을 읽고 있던 나는 그녀의 부름에 응했다.
“자기 나 안 버릴 거지?”
뜬금 없는 소리였다.
“무슨 말이야 그게 대체?”
“아니 그냥......”
그녀의 말에 슬금슬금 불안감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와의 만남 이후 처음 느낀 불안함이었다. 그녀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은 아니었다. 이 느낌은 흡사 그 최면 술사를 만났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그냥이 어딨어. 갑자기 그런 말 할 애도 아니구. 일루와봐.”
내 부름에 그녀는 내 옆에 앉아 고개를 푹 숙인 채 내 어깨에 기댔다.
“자기 아무래도 나 임신한 거 같아......”
“뭐?!”
축하할 일임이 분명했다. 누가 들어도 축하한다고 말해줘야 당연한 일이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검은 머리가 파뿌리 되도록 사랑하겠습니까. 따위의 주례사가 오간 후 백년가약을 맺은 기혼자라면 말이다.
솔직한 심정으로 기쁘기 보단 당황스러웠다. 그녀가 내 아기를 가졌다. 결혼을 해야 한다. 부모님이 알게 된다. 학과대, 놈이 알게 된다. 놈이 비웃는다. 세상의 웃음거리가 된다.
“그런 말이라면 당장에 했어야지!”
속마음과는 정반대로 가식적인 웃음으로 나는 그녀에게 화답했다. 그녀는 그제 서야 안심하며 내 입술에 가벼운 키스를 하더니 말했다.
“그렇지? 그래서 말하러 왔잖아. 자기 우리 낳아서 잘 기르자. 응? 우리 결혼해서 이 애 잘 키우자.”
“으......응.”
찜찜함.
그녀의 모든 면이 좋았지만 언제나 그 뒤엔 아무도 모를 찜찜함이 남아 있었다. 그것은 놈에게 유린당할 대로 유린당하고 버림받은 그녀의 과거와 대학가 내에 파다하게 소문나 버린 그녀의 ‘대걸레’ 라는 별명이 한 몫을 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 날 이후 나는 이상하게도 그녀를 피하게 됐다. 나도 나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다. 그녈 평생 사랑하겠노라고. 영원히 함께 하겠노라고 다짐한 지가 고작 일 년도 안 된 일이었다. 그런 내가. 그런 그녀를 피하고 있었다.
“자기야 왜 전활 안 받어? 집에도 없구. 도대체 왜 그러는거야? 자기야 나 불안해...... 이 메시지 보면 연락해줘. 알았지?”
하루에 이런 메시지가 열 몇 통 씩 오갔다. 나는 그러는 날이 잦아지면 그녀가 그만두고 끝내자고 할 줄 알았다.
‘왜냐하면 나와 넌 처음부터 어울리지도 않았고, 난 너보다 모자란 남자였고......’
핑계.
나 역시도 핑계란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도 어쩔 수 없는 인간이었나 보다. 어차피 나는 개인주의가 아니었던가.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기합리화 하려는 그런 족속.
그러나 내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그녀의 메시지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수십통 씩 날라 왔다. 나중엔 그걸 확인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녀의 원망 섞인 목소리가, 학과대를 향해 울부짖던 그 목소리가 날 붙잡을 까 두려워 메시지를 확인 할 수 없었다.
딩동딩동.
집에 아무도 없는 날이었다. 요 근래 집이 빌 날이 없어 그녀는 집에 찾아왔다가도 집밖에서 기웃거리다 가곤했다. 그런데 용케도 집에 아무도 없는 걸 알았는지 그녀가 초인종을 눌러댔다. 도저히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문 앞에 서서 인터폰 을 들고서 그녀의 모습을 확인했다. 인터폰 너머로 보이는 그녀의 모습은 상상이상으로 초췌해져 있었다. 그녀의 배는 조금이지만 불룩했다. 아마 내게 임신 사실을 밝힌 건 그녀가 끙끙 앓다가 몇 개월이 지난 이후였던 것 같았다. 그녀는 성난 얼굴로 초인종을 계속해서 눌러댔다.
“장성훈! 장성훈! 자기야 나라구! 나! 서하나 라구! 문 열어 안에 있는거 다 알어!”
나는 끝내 그녀를 외면했다. 부모님의 완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학교를 자퇴했다. 분명 예전의 나였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터였다. 나는 자퇴 후 대부분의 시간을 집안에서만 보냈다. 2층 내방 창틈으로 밖을 내다보면 그녀는 언제나 내 집 근처를 기웃거렸다. 학과대 놈을 따라다니던 때를 돌이켜보면 그녀가 쉽사리 포기 하지 않으리란 걸 알 수 있었지만, 막상 내가 당해보니 정말 숨통이 콱콱 막혔다. 그녀는 거의 스토커 로 바뀌어 있었다.
“자기야 사랑해! 사랑해!”
집에 아무도 없을 때면 언제나 약간 부른 배를 안고서 초인종을 누르며 소리치는 그녀 때문에 하루 중 열두번 도 더 미쳐버릴 지경이었다.
내 꿈에 그림자가 다시 나타난 건 그 무렵이었다.
“최면술사의 말 기억나?”
“어떤 말......”
“책임 질 수 있느냐고.”
“.......”
“기억 안 난다곤 말 못할 테지.”
“이럴줄은 몰랐어.”
“네놈은 항상 그런 식이잖아. 뭘 몰랐다는 거야. 넌 처음부터 그년이 걸레란 걸 알고 있었어.”
“그치만 사랑했다구.”
“그런데 지금은 아니야?”
“모르겠어...... 다만...... 다만 내 자신이 견딜 수 없어.”
“남의 시선을?”
“......그래.”
“멍청이...... 난 네놈의 파멸을 지켜 볼 거야. 그리고 비웃어 줄거라구. 넌...... 구제불능이야.”
상실.
삶의 의욕을 잃었다고 해야 할까.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사랑했던 그녀는 스토커가 되어 내 주위를 기웃거리고 있었고, 나는 그걸 무서워서 피하고 있는 꼴이라니.
눈을 떴을 때 창 틈새로 햇살이 들어와 내 미간을 간질이고 있었다. 나는 눈을 뜨자마자 제일 먼저 창 밖을 확인 했다. 그녀가 없었다.
“드디어......그만 둔건가......”
홀 가분 했다. 그래 차라리 그녀도 이런 날 잊고 다른 곳에서 행복하게 살면 그만인 셈이었다. 서로에게 더 이상 짐이 되어서 무엇 하겠는가.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1층으로 내려왔다. 부엌에 앞치마를 하고 식사를 준비하는 가정부 아줌마 뒷통수를 보고 인사했다. 부모님은 안 계신 모양이었다. 거실 쇼파에 앉아 TV를 켜려는데 검은 브라운관에 비치는 뒷풍경이 이상하게 낯설었다. 거기엔 가정부 아줌마가 있었다. 묘하게 젊어 보이는 가정부 아줌마가.
“깼어?”
앞치마를 두르고 식사 준비를 하는 그녀. 서하나. 그녀였다. 어떻게 된 일일까. 어떻게 그녀가 이 집에......
“어......어.”
“그 동안 다른 곳에 가 있었던 거야? 왜 연락도 안 받구, 연락도 안했던 거야?”
“그.....그게...... 휴대폰을 잃어버렸는데, 자기 휴대폰 번호를 잊었지 뭐야 하......하하.”
“그래......? 난 자기 휴대폰 번호 안 까먹는데. 섭섭하네......”
탁.
그녀의 부엌칼 질이 서툴렀는지 도마 위를 굴렀나 보았다. 나는 마른 침을 얼른 삼키고 말을 돌렸다.
“그래 우리 애기는 어때?”
“우리애기...... 잘 있지. 그래 우리애기가 생각났으면 전화 했을 텐데 말야......”
탁.
“어머 자꾸 부엌칼이 미끄러지네. 자기 맛있는 거 해주려고 그러는데......”
그녀는 커다란 프라이팬에 썰은 야채를 넣고 요리를 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녀는 식탁 앞에 요리를 차리고선 내 앞으로 와 식사를 권유했다. 가까이서 본 그녀의 얼굴은 예전의 그 얼굴이 아니었다. 야위었고, 마른 몸 때문에 그런지 나온 배가 더 나와 보였다. 산발한 머리는 손톱으로 긁었다간 당장에라도 이가 수십 마리는 손톱에 박혀 나올 만큼 지저분했다. 게다가 낮에도 밤에도 집 주위를 기웃거려서 그런지 온몸이 새카맣게 타서는 정말이지 아프리카 난민이 따로 없는 몰골이었다.
“나 많이 말랐지.”
“으응.......”
“하두 자기 연락이 안돼서 그렇지 뭐야......아무튼 내가 맛있는거 했으니까 먹고 얘기 하자. 결혼 이야기두.”
“그,그래......”
하는 수 없이 그녀와 식사를 했다. 어떻게든 어르고 달래서 보낼 심산 이었다. 갖은 비위를 맞추어 주더라도 보내고 난 뒤에 어떻게든 할 작정이었다. 이대로라면 가택침입이 틀림없었다. 스토커. 말 그대로 그녀는 완벽한 스토커로 변해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식사를 하는데, 뜬금없게도 아까 전에 그녀가 하던 요리가 궁금해졌다. 커다란 접시에 한가득 담겨 있는 요리는 고기 요리 였는데, 빨간 양념에 잘 베어 은근히 먹음직스러웠다.
“이거 맛있겠는데?”
“그럼, 맛있을거야 자길 위해 준비했는데......”
고기는 생각보다 질겼다. 무슨 고기 일까 돼지고기? 쇠고기? 닭고기?......
문득 머리에 스치는 흉측스러운 느낌. 무언가가 내 목덜미를 핥고 지나간듯 오싹한 기분이 나를 스쳤다. 오늘 아침. 눈을 떴을 때에도 1층에 내려왔을 때에도.
메리는 보이지 않았다.
“메리......”
“메리? 아 걔 화장실에 있어.”
“화......화장실에?”
그녀는 고기를 뜯어 먹으며 손짓했다. 양념이 묻은 입이 마치 피를 머금고 있는 흡혈귀처럼 흉측했다.
“기다려 밥먹고 있어 내가 데리고 올게.”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화장실로 들어가 버렸다.
“설마......설마.......”
그렇게 혼잣말을 하고 있는데, 그녀가 화장실에서 나왔다. 한손에 메리를 들고. 메리의 하얀 털이 촘촘하게 박혀있는 가죽과 버럭 뜬 눈이 충혈 되어 있는 머리를 들고.
“허......허억!”
나는 의자에서 뒤로 발라당 넘어졌다.
“얘 찾던거 아니었어?”
“어......어떻게 된거야 설마 너!”
“고기 요리 해주고 싶은데 마침 고기가 없더라구. 근데 또 오늘이 장날이 아니래. 돈은 없구, 자기한테 고기 요린 해주고 싶구,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횡설수설 하는 그녀는 거의 미친게 틀림 없었다. 메리는 10년을 키워온 개였다. 힘들 때나 슬플 때나 즐거울 때나 언제나 내 곁을 지켜주었던 단 하나 뿐인 친구였다.
“네년이 메리를 죽였어!”
“뭐라구?”
순간 그녀의 얼굴이 돌변했다. 저 얼굴. 기억났다. 학과대 놈에게 온갖 욕을 먹고 나를 보며 했던 말.
“가! 너 때문이야! 너 때문에 오빠가 가버린 거라구!”
그 때의 얼굴하고 똑같았다.
“10년동안 키워온 내 소중한 친구를......”
그러자 그녀는 우악스럽게도 메리의 너덜너덜한 가죽을 자기 얼굴 옆으로 들어올리며 말했다.
“이 개새끼가 좋아 내가 좋아?”
“미친년...... 완전히 돌았어.”
“말해 이 개새끼가 좋아 내가 좋아!”
“내 집에서 썩 나가 이 미친년아!”
나는 참을 수 없는 분노에 몸을 맡겼다. 그 이후의 일은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단 하나 기억나는 건 그녀의 원망스러운 그 얼굴 뿐.
시간이 보내며 나는 그날의 악몽을 잊으려 애썼다. 새로운 애완견도 사고, 멍멍이라는 이름을 붙여주며 정성스레 돌봤다. 새로운 여자친구도 사귀고, 예전보다 더 호화롭게 보냈다. 부모님의 후광은 여러모로 쓸 모가 많은 편이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그림자는 내 꿈을 떠나지 않았다.
“오랜 만이지.”
“그래 오랜만이네.”
“어때 파멸을 맛보니까.”
“파멸? 이런 것이 파멸이라구? 웃기지마 이런 일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구.”
“과연 그럴까 하하하하하하하하하”
그림자는 웃고 있었다. 여전히 어두운 곳에 숨어서 웃고 있었다. 그 순간 머리 맡에서 형광등이 깜빡 깜빡 거리기 시작했다. 예의 직사각형 콘크리트 구조물 이었다. 그런데 그곳에서 날 비웃고 있는 건 그림자가 아니었다. 그녀였다. 그것도 흉물스럽게 변한 몰골로.
“잊지 않았겠지.”
“뭐,뭘......?”
“네가 내 뱉었던 말 말야......”
“내가 뭐라고 했단 말야?!”
“여.......”
“헉!”
피를 말리는 악몽이었다. 식은땀이 흐르다 못해 탈수 증세까지 보였다. 속옷은 물론 배게 마저 다 젖어서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나는 일어나자 마자 1층으로 내려갔다. 냉장고 문을 열려고 부엌으로 들어서려는데 앞치마를 두른 그녀가 있었다. 나는 순간 계단에서 구를 뻔했다. 그녀가 있을 리가 만무했다.
“성훈이 일어났어?”
“네......”
가정부 아줌마였다. 나는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래도 성에 안 차서 냉장고 안에서 1.5리터 들이 이온음료를 숨도 안쉬고 다 들이켰다. 그제야 조금 살 것 같았다. 요즘들어 이런 악몽이 계속 되고 있었다. 어째서 그런 악몽이 계속 되는지 생각해보면 최면술사를 만나러 갔던 그 기억에서 멈춘다. 한 낱 꿈같았던 그 기억은 아직도 흐리멍텅하게 남아있다. 놈은 그녀에게 최면을 걸어주는 대신 유희를 가져가겠노라고 말했다. 헌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 말은 어느 하나도 믿을 구석이 없었다. 도대체 어디에 가서 그녀가 최면에 걸려 날 사랑했다는 증거를 찾을 수가 있느냔 말이다.
‘이러다 말겠지.’
그렇게 자위 하려 해도 치밀어 오르는 불안감은 온몸에 덕지 덕지 붙어서 떨어져 나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밤이 찾아왔다.
“어 집으루 와 기다릴 게.”
새로 사귄 여자친구를 집으로 불러들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새로 사귄 여자친구라고 해봤자 돈에 눈먼 계집중 하나일 뿐이었다. 나 역시 그녀 배위에 올라탐으로써 쾌락을 얻고 그녀는 돈과 예쁜 의류를 얻을 테니 서로 남는 장사였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띵동.
초인종이 울렸다.
“자기야?”
현관문 근처까지 다가가 도어록을 돌리려는 찰나 누군가 내 등뒤를 훑고 지나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오싹함. 고개를 돌려 무엇인지 확인했으나 아무것도 없었다. 괜한 착각인 모양이었다. 그래도 불안해서 나는 그냥 문을 열어주려던 것을 포기하고 인터폰을 들었다. 없었다. 인터폰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누......누가 초인종을 누른거지.”
띵동.띵동.
인터폰을 들고 바깥을 확인하고 있는 사이에도 초인종은 계속 해서 울렸다. 다른 집에서 울리는 것은 분명 아니었다. 근방에서 우리 집 까지 초인종이 울릴만큼 큰집은 없었다. 꼬마아이가 장난을 치는 것일까. 그럴지도 몰랐다 초인종은 인터폰 보다 아래에 있었다.
나는 용기를 내어 무기가 될 만한 것을 손에 들구 문을 열었다. 살며시 그것도 조용하게. 아무것도 없었다.
“뭐야.”
문을 다시 닫으려는 순간 문이 뭔가에 걸려 닫히지 않았다. 나는 무심코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 앉고 말았다.
서하나.
그녀였다. 그녀의 온몸에서 썩는 내가 진동했다. 부른 배를 질질 끌며 집안으로 들어오려는 그것은 분명 그녀가 분명했다.
시체.
살아있는 자의 그것이 아니었다. 머리카락이 있던 자리는 군데 군데 살점이 떨어져 나간 자리가 언듯 언듯 보였고 그곳엔 빨간 딱지가 말라붙어 있었다.
“여......여......”
그녀가 아니 그것이 내 곁으로 기어 오고 있었다. 도망쳐야 하는데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어......어떻게 된거야 내가 분명 그날...... 그날 죽여서 뒷산에 묻었는데 어......어떻게.”
“여......여.......”
고갤 치켜들고 기어오는 그것의 얼굴은 썩어문드러져 거의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었다. 다만 가끔씩 벌어지며 쇳소리를 내는 목 근처에서 구더기 여남은 마리가 떨어지고 있었다. 눈알 한쪽은 실핏줄에 의지해 겨우 제자리 근처를 휘젓고 있었고, 입술은 다 찢어져 너덜너덜 거리고 있었다. 그런 몰골이지만 내가 그녀라고 확신하는 이유는 바로 하나 남은 그녀의 눈이 나를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눈은 잊을 수가 없다. 내가 그녀를 목 졸라 죽였던 그날 날 바라보던 원망스런 그 눈빛. 잊을 수가 없다.
그것은 계속해서 내게 다가왔다. 어느새 아랫도리가 축축해져왔다. 미칠듯한 공포에 치가 떨렸다. 그것이 기어올 때마다 기어온 자리에는 떨어져 나간 살점이 더덕더덕 붙어있었다.
“여.....영......영원......”
“사.....살려줘.”
그것이 거의 내 앞까지 왔다. 내 경직된 몸을 타고 내 눈앞에 얼굴을 맞대었다. 구더기가 수도 없이 떨어지는 목이 열리면서 쇳소리가 흘러나온다.
“영원......히......함......께......”
햇살.
밝은 햇살 아래 아무도 없는 거릴 걷고 있었다. 눈이 부실 정도로 밝은 햇살 이 너무도 강해 나는 더 참지 못하고 고갤 돌려 버렸다. 그러자 뒤에서 앞으로 돌아온 그림자가 보였다.
“오오. 이제 앞으로 돌 줄 아네?”
“그럼. 예전의 내가 아니라구.”
“멍청이 그래도 넌 멍청이야.”
“그래 난 바보지. 가질 수 없는 걸 가지려고 했으니까.”
“그래 공평하지 않은 세상 저 마다 한 두가지 씩은 고통이 있다구 그걸 못 이겨 낸 거야 넌.”
“.......그나저나 저기 오네.”
“아 정말 오네.”
멀찍이서 무언가가 다가오고 있었다. 나와 그림자는 서둘러 그것을 맞이하러 갔다. 거리가 좁혀져 오자 그것의 형체가 슬그머니 보이기 시작한다.
그림자.
누구의 것인지 꽤 아름답게 생긴 그림자다. 그 그림자가 내 뒤로 오더니 그곳에 자리 잡는다.
“영원히 함께.”
“영원히 함께. 내가 했던 말이지. 그 최면술사 에게.”
“그래 그 최면술사에게 네가 했던 말이지. 기억나 그 필라멘트 잔상?”
“그럼.”
그림자는 침묵했다. 또 다른 그림자는 말없이 내 뒤를 따라왔다. 목 언저리가 따갑다. 햇살이 따갑다. 그래도 걷는다.
그림자가 두개다.